전경욱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봉산탈춤의 전승 현황과 연희 배경

봉산탈춤은 원래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1915년 무렵 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이전하자, 탈춤도 함께 사리원으로 옮겨가 전승되었다. 남한에서는 6·25 때 월남해 온 김진옥·민천식 등의 고증에 의해 봉산탈춤이 복원되어 전승되다가,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서울 소재)에 보존회 사무실을 두고 있다.
봉산탈춤은 강령탈춤과 함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해서(海西)탈춤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특히 1936년 8월 31일 사리원 경암산 아래 마당에서 백중날 거행한 공연이 경성방송을 통해 전국에 중계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봉산탈춤은 주로 단오날 연행되었고, 그 외에 중국 사신의 영접이나 신임사또의 부임을 축하할 때 등 관아의 행사로도 연행되었다. 봉산 구읍은 동북 직로에 위치한 봉산군 관아의 소재지였고, 중국 사신의 내왕에 머무르는 곳이었다.
놀이꾼은 관아의 하급관속·상인·마을주민이었다. 하급관속의 참여로 인해 가면극의 공연이나 연출이 유리했고, 연기의 수준도 향상될 수 있었다. 1900년 무렵까지는 관아의 악사청으로부터 반주음악을 담당할 악사들을 쉽게 지원받을 수 있었다. 한일합방으로 인해 악사청이 해산된 이후에는 가창리의 재인마을에서 악사들을 초청해 공연했다.

혁신적 주장을 담은 사회 풍자극으로서의 봉산탈춤

봉산탈춤은 조선 후기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한 사회 풍자의 희극이다. 봉산탈춤은 제의적 성격에서 벗어났는가 하면, 이전에 존재하던 잡기 수준의 탈춤을 혁신적으로 개작해 연극적인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있다.
첫째, 봉산탈춤을 비롯한 산대놀이 계통 가면극들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문제가 되던 여러 부조리를 풍자한다. 이를 위해 문희연(聞喜宴) 등에서 연행하던 양반 풍자의 유희(儒戱), 산희(山戱)에서 연행하던 파계승 풍자의 만석중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었던 처첩의 삼각관계를 다룬 영감과 할미춤 등 기존에 따로 존재하던 내용들을 결합해 하나의 가면극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봉산탈춤은 독립된 여러 내용이 모여 하나의 가면극을 구성하는 방식(옴니버스 스타일)을 특징으로 갖게 되었다.
우선 양반과장은 기존의 유희(儒戱)를 활용해 연극적인 형식과 내용을 갖추었다. 유희는 과거급제자 잔치인 문희연에서 반드시 연행되던 연희인데, 선비(유학자)를 풍자하고 유가(儒家) 및 유학경전을 희롱하는 내용이다. 유희에서 유학자를 조롱하듯, 양반과장에서는 양반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양반들의 가면이 첫째 양반은 쌍언청이, 둘째 양반은 언청이, 종가집도령 가면은 얼굴과 코가 비뚤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그림 1) 이를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거부하고 양반층의 특권을 비판하는 민중의식을 드러낸다.
또한 노장과장은 기존의 만석승무를 활용해 성립되었다. 최근 발견된 채색화 〈낙성연도(落成宴圖)〉에서 채붕을 중심으로 연행되고 있는 공연 종목들은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의 《경도잡지(京都雜志)》권1 성기(聲伎) 조에 나오는 산희와 일치한다. 이 기록에서 “산희는 다락을 매고 포장을 치고 하는데, 사자춤·호랑이춤·만석중춤을 춘다.(山戱結棚下帳 作獅虎曼碩僧舞)”고 지적했다. 채색화 〈낙성연도〉의 아래 부분에 두 개의 다락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채붕이다. 채붕앞에서 사자탈춤과 호랑이탈춤을 추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 채붕 위에 칡베장삼을 입은 노장과 기생, 왼쪽 채붕 위에 술에 취해 얼굴이 붉은 취발이와 기생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만석승무(曼碩僧舞), 즉 만석중춤이다.(그림 2) 이 만석승무는 그림자인형극인 만석중놀이와는 다른 연희로서, 지족선사와 황진이의 전설을 가면무로 표현한 것이다.1
북한 학자 김일출은 개성의 산대놀이에서는 노장을 바로 만석중인 지족선사로, 당녀(기생)를 황진이로 간주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즉 만석중놀이의 발생설화(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유혹해 파계시키는 내용)가 그대로 개성 산대놀이에 반영되어, 노장으로 지족선사(만석중)가, 당녀로 황진이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2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추재기이(秋齋紀異)》 에 의하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활동했던 연희자 탁문한(卓文漢)이 만석승무를 추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기록에서 “황진이는 활보하며 얼굴을 수그리고, 만석중은 비틀비틀 장삼 입고 춤을 춘다.(眞娘弓步斂蛾眉 萬石槎槎舞衲緇)”는 내용은 현전하는 가면극의 노장과장에서 처음에 노장이 장삼을 입고 등장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비틀 하는 장면과 일치한다. 그래서 현전 가면극 노장과장의 유래가 지족선사와 황진이의 전설로부터 비롯됐음을 전해준다.
둘째, 봉산탈춤의 주제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주장으로서 기존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요구하는 민중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 가면극은 사회적 불평등으로 빚어지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제시한다. 등장인물의 명칭에서부터 각 과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암시한다. 노장·소무·신장수·양반·말뚝이·영감·할미 등 신분이나 부류를 나타내는 명칭이 대부분이고, 구체적인 개인의 이름은 드물다. 명칭을 통해 가면극에서 다루는 것이 등장인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신분이나 계층·부류 사이의 문제임을 드러낸다.
양반 풍자를 통해 드러나는 양반의 신분적 특권, 파계승 풍자를 통해 드러나는 노장의 관념적 허위, 처첩 간의 삼각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영감의 남성적 횡포는 봉건사회의 유물이다. 이 부정적 유물이 청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봉산탈춤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식의 발전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긍정적 인물인 취발이·포도부장·말뚝이·할미를 통해 기존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요구하는 민중의식을 보여 주는데,3 이것은 동학농민혁명 등 중세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역사적 운동과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그림 2. 채색화 <낙성연도>의 채붕과 산희 장면. 사자춤 · 호랑이춤 · 만석승춤.

NOTE
1.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274-279면.
2. 김일출, 《조선민속탈놀이 연구》, 평양: 과학원출판사, 1958, 188면.
3. 조동일, 《탈춤의 역사와 원리》, 홍성사, 1981, 185-19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