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저스 페랄타(Jesus T. Peralta)
고문, 필리핀 국가문화예술위원회

필리핀의 루손(Luzon) 북부의 코르딜레라(Cordillera) 지역에 분포한 산간 계단식 논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등재 설명문에는 쌀에 관한 언급은 없다. 또한 16~17세기에 코르딜레라에 들어온 스페인 탐험가들은 계단식 논에 관해 기록하였으나 쌀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푸가오(Ifugao)족의 거주 지역에는 두 가지 방식의 농경 기법이 전승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화전(火田)식 농법이며, 다른 하나는 토란(taro)의 건지 경작과 관련된 과거의 농법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는 일부 종류의 토란이 산간 개울을 따라 조성된 물웅덩이를 포함한 습지에서 잘 자란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으로, 이푸가오의 연장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토란을 선호한다. 이러한 물웅덩이가 점차 작은 계단식 농지로 발전되었다.

실제로 토란 경작을 위한 이러한 건식 · 습식 농법은 코르딜레라 지역 남부, 특히 누에바 비스카야(Nueva Vizcaya) 지역의 이와크(I’Wak), 이칼라한(Ikalahan) 부족들 사이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칼라한족은 사실상 이 지역 남부에 거주하는 이푸가오족의 한 갈래인 칼랑구야(Kalanguya)족과 동일한 계통에 속한다. 실제로 이푸가오족은 단일 부족이 아니라 몇몇 부족으로 구성된 연합체이다. 그 중 투왈리(Tuwali)족과 아양간(Ayangan)족이 주요 부족이며, 세 번째 집단인 칼랑구야족의 언어는 다른 부족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본래 이푸가오족의 주산물은 근채류(根菜類) 식물이며, 그 중 토란은 가장 오랫동안 경작해 온 식물로서 별도의 제의적 명칭을 지니고 있을 만큼 부족 제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쌀은 훨씬 나중에 유입되었으나 점차 가장 중요한 작물로 정착되었다.

필리핀에서 쌀의 존재에 대한 최초의 증거는 기원전 2510~2130년 사이에 발견된다. 카가얀(Cagayan) 지역의 안다라얀(Andarayan)의 망가(Manga) 유적지에서 발굴된 도기 안에서 쌀껍질이 발견되었다. 쌀은 생장을 위해 풍부한 물 공급이 필요한 저지대 작물로서 고지대에서는 적응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경작지의 고도가 높을수록 쌀 수확량이 감소한다. 이푸가오족의 쌀 경작기법은 기본적으로 산지 계단식 논의 저지대에 맞춰졌으며, 이를 위해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현재의 바나웨(Banaue) 지역에서는 이미 기원전 1545~1000년 사이에 인간이 거주한 집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분가할리안(Bungahalian)의 경우 7세기에, 나비운(Nabyun)의 경우 1195~1380년 사이에 계단식 논이 활용되었음이 보고된 바 있다. 이후 보코스(Bocos)와 바나웨에서는 1486~1788년 사이에 쌀농사의 증가에 따라 계단식 논이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이푸가오족의 계단식 논은 산지를 개간하여 조성한 것이 아니라 산의 경사면 근처에 돌이나 흙으로 벽을 쌓아올리고 그 사이에 잡석과 흙을 겹겹이 쌓아올린 뒤, 물이 새지 않는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유기토를 까는 방식으로 조성된다. 계단식 논 위에는 물 보관소 역할을 하는 숲이 있으며 논 곳곳으로 배수로가 연결되어 있다. 계단식 논은 지반이 약한 관계로 카라바오(carabao)와 같은 가축을 이용한 농경은 불가능하며, 농부들이 나무 가래를 사용하여 손수 경작한다. 벼는 연초에 모를 심어 6월경에 수확하며, 이는 저지대 벼농사 방식과는 대조적이다.

환경과 농경기술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이푸가오족은 경작 활동과 관련된 수많은 제의들을 안출하였으며, 그 중 쌀농사에 관련된 제의는 적어도 22종에 이른다. 이푸가오족이 적어도 2,000위 이상의 신들을 숭배하는 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