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마 A. 레스피시오
명예교수, 딜리만 필리핀대학교 예술문학대학 예술학과

태평양 서쪽 끝 남중국해 열대 해양에 위치한 필리핀은 1월부터 5월까지가 건기이며 나머지 기간에는 비가 많이 내린다. 특히 6-9월에는 장마가 이어진다.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기후변화에 취약하다. 한여름이 되면 훈훈한 바다 공기는 40도에 이르며 타는 듯한 열기로 변한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계절풍 강우가 엄청나게 퍼붓는다.

태풍 욜란다 / 하이얀과 옴퐁

3년 전, 비사야스(Visayas) 동부에 위치한 레이테(Leyte)와 사마르(Samar)섬이 5등급 태풍에 초토화 되었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초강력 태풍 하이얀은 수천 명의 인명을 앗아갔으며 모든 초목을 쓰러뜨리고 건물을 파괴했다. 돌풍은 측정이 불가능해 보였다. 바닷물은 해안가 마을의 코코넛 나무를 집어 삼키고 메가톤급 상선도 들이 받았다. 예상치 못했던 강력한 바람과 바닷물 때문에 지역민은 물론 온 나라가 할 말을 잃었다. 달루용 또는 파도라는 단어는 여기에 쓰기에는 너무나 적절치 않은 말이었다.

올 가을, 또 다른 초강력 태풍, ‘옴퐁’이 전국을 강타했다. 태평양에서 북부 루손(Luzon)지역을 가로질러 이사벨라-까가얀(Isabela-Cagayan) 북동부 계곡에 착륙한 이 태풍은 코르딜레라(Cordillera) 산악지대를 휩쓸고 일로코스(Ilocos) 평원을 거쳐 필리핀 서해상으로 빠져나갔다. 태풍의 눈은 너무 강력하여 그 중심부 범위가 수백 킬로에 걸쳐 있었다. 이로 인해 수백 년 된 나무가 뿌리째 뽑혔으며 유리창은 산산조각 나고 가옥 지붕은 날아가 버렸으며 모든 농작물이 쓰러졌다. 코르딜레라 산악지대에 있는 많은 지역이 침식되었고 도로가 끊겼으며 산사태가 일어났다. 최악의 피해를 입은 곳은 20세기 초에 설립된 광산공업 지역이었다. 태풍으로 산기슭이 상당히 침식되었고 식생도 파괴되었다. 규모가 작은 광부들의 집이 무너져 내려 광부들과 가족이 함께 흙더미 속에 묻히거나 나무에 깔렸다.

하지만 모든 지역이 다 피해를 보거나 처참해 진 것은 아니다. 코르딜레라 산악지대의 다른 한쪽에는 기후변화의 피해를 완화하거나 혹은 방지할 수 있는 문화와 관습이 있다. 바로 ‘라팟(Lapat)’이다. 이는 지역민에게 경제 토대가 되는 토지와 천연자원을 관리하는 토착 시스템이다. 나무, 넝쿨, 야생동물, 시내나 강에 사는 물고기, 조개와 같은 천연자원 채취와 활용을 규제함으로써 전체 생태계를 보호,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식생을 보강하는 방식이다.

라팟 시스템은 1) 보호관리, 2) 공동소유 및 집단책임, 3) 지속가능성이라는 3가지 원칙을 통해 지켜지며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보호관리 원칙

라팟의 가장 유명한 지지자인 필립 틴고농(Philip Tingonong)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보호관리 원칙에서 말하는 토지와 천연자원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으로 민족의 유산이다. 따라서 이 물질적-문화적 유산을 후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삶과 문화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토지와 천연자원을 잘 돌보고, 보호하며, 육성해야 한다. 공동체는 이러한 보호관리 원칙에 따라 건강하고 견고한 숲을 유지할 책임이 있다. 모든 지역에서 나무를 심는 것은 지속가능한 활동 중 하나이다.

Loading cogon grass onto a bamboo raft © Renato S. Rastrollo

라팟 지역에서는 독수리, 부엉이, 코뿔새와 같은 야생조류 사냥을 금지하는 국가법령에 따라 사슴, 멧돼지, 조류 사냥을 규제하고 있다. 암컷과 새끼를 밴 동물이 덫에 걸렸을 때에는 풀어주어야 하며 사냥을 해서는 안 된다. 일단 대상이 되는 동물이 라팟 지역에 들어가면 사냥꾼은 이를 쫓아 들어가 사냥할 수 없다. 이런 원칙 덕분에 라팟 지역은 동물과 조류의 성지가 되고 있다.

공동책임의 원칙

공동책임의 원칙에 따라 토지와 천연자원은 공동체에 속하며 생산물의 수확과 활용은 규제를 받는다. 천연자원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특정 개인이나 가족이 유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모든 자원-토지, 분수계(分水界), 시내, 숲-은 공동체의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각 구성원은 이를 보살피고 보호하며 알려 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지역에서 건답농사를 하기 위해 산비탈의 코곤(cogon) 풀과 관목에 불을 놓아 제거할 경우, 범위를 지역 내로 한정하고, 통제하는 책임은 기본적으로 불을 놓는 개인에게 있다. 불을 놓을 때에는 다른 작물을 심어놓은 인접 땅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반드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를 어긴 개인이나 가족은 전체 공동체 구성원이 결정한 처벌을 받는다. 현재 이러한 활동은 공동체의 연장자나 책임있는 이웃의 감독을 받는다.

지속가능성

세 번째 원칙은 지속가능성이다. 비록 라팟 지역 자원이 풍부하다고는 하지만 숲, 특히 분수계에서 무분별하게 나무를 벌목하거나 강이나 시내에서 물고기를 잡지는 않는다. 나라(narra), 몰라브(molave), 카마공(Kamagong)과 같은 경질수목의 경우, 가옥 기둥, 마루 그리고 대들보에 쓰려면 정해진 연수 이상 자라야 벌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벌목의 양 또한 지으려는 집 모양, 크기에 따라 필요한 만큼으로 제한한다. 라탄, 니토(nito) 넝쿨, 아니봉(anibong)이라 불리는 공작야자나무도 마찬가지로 정해진 연수 이상 성장해야 사용할 수 있다. 라탄은 집 지붕 대들보에 야자 나뭇잎을 고정시키는 데 사용한다. 대나무, 니토 넝쿨과 함께 농장에서 쓰는 바구니, 가방, 모자를 짜는 데도 주로 사용하는 재료이다. 공작야자 나뭇잎은 지붕을 엮는 데에 쓴다.

Abra rice fields © Cecilia V. Picache

지속가능성 원칙은 강이나 시냇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물고기, 갑각류, 조개, 개구리와 같은 강에서 나는 식량을 채집할 때에는 독극물이나 화학약품 사용을 엄격히 금지한다. 작은 강에서 살아가는 생명이 멸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심지어 살라파단(Sallapadan) 지방정부의 바랑가이(Barangay, 필리핀의 최소행정단위) 바자(Bazar)의 공무원이자 원로인 조니 발라오-아드(Johnny Ballao-ad)의 주장에 따라 물에 젖으면 독성물질을 뿜어내는 불라이(bullay) 꽃을 던져 물고기를 잡는 옛날 방식조차도 금지하고 있다.

자원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숲, 분수계 그리고 강의 특정지역을 일정기간,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라팟으로 선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원의 재생이 가능해지며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과 가까운 친척들이 함께 모여 즐기고 나눌 수 있다. 지속가능한 번영을 위해서는 라팟 시스템이 고수하는 다른 두 가지 원칙, 즉 보호관리와 공동소유 및 공동책임을 똑같이 준수해야 하며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각 원칙은 서로 다른 원칙을 지탱해 주는 요소이다.

바로 이러한 원칙 때문에 라팟 지역에서는 대규모 광천수 추출과 상업용 목재개발을 금지하고 있다. 공동체 원로들은 대규모 광산지역에서 물이 오염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조상으로부터 지혜를 터득한 원로들에게 금은 귀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상업적 광산이 농사, 생활방식 그리고 유산을 유지시켜온 강과 물길을 오염시킬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라팟 시스템과 정부의 법제도

라팟의 법 집행과 행정은 코르딜레라 행정지구 아브라 주에 속하는 살라파단, 볼리네이 그리고 북록(Bucloc) 지방정부-바랑가이와 지방정부 차원에서-의 법에 따라 공식화되고 시행되어 왔다. 라팟 시스템은 효과적인 토착 천연자원 관리 시스템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전체 시행은 코르딜레라 산악지대 농업자원 관리 프로젝트의 주력 프로그램이다.

라팟 시스템은 코르딜레라 산맥 북서쪽에 위치한 아브라 주 이트네그(Itneg) 족을 통해 활발하게 전승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살라파단, 볼리네이 그리고 북록의 마을에 사는 마사디트 이트네그(Masadiit Itneg)라는 소집단에 의해 시행되고 있다.

기후변화의 영향을 완화시키는 라팟 시스템

2018년 9월 북부 루손을 강타했던 초강력 태풍 옴퐁이 지나간 이후, 바랑가이 카가와드(Kagawad)의 조니 발라오-아드의 아내 팍시타 발라오-아드(Pacita Ballao-ad) 그리고 바자, 살라파단의 전체 바랑가이의 의장 엘리자 다기와스(Eliza Dakiwas)는 태풍이 이 지역 자원에 미친 피해가 크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몇몇 작은 나뭇가지만 부러졌을 뿐이며 새로 건설된 도로 일부만 약간 침식되었고 가장 중요한 인명이나 동물의 생명에는 영향이 없었다. 이는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와 영향을 최소화하는 라팟 시스템이 가진 긍정적인 효과를 입증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과 인터뷰 대상자

2004. The Way of Lapat, an Effective Indigenous Natural Resources Management System of the Tinggians in Abra, Philippines. Baguio City.

인터뷰 대상 : 필립 틴고농, 마누엘(Manuel)과 테시 암발네그(Tessi Ambalneg) 여사, 엘리자 다키와스, 조니와 팍시타 발라오-아드 부부, 방구에드 아브라(Bangued Abra)의 재난위기경감사무소의 도미나도르 푸돌(Diminador Pud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