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실키스
이사, 양심회복을 위한 국제연합

세계유산협약이 정의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관한 공공 담론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프란체스코 반다린 전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소장은 최근 ‘우리의 세계유산’ 이니셔티브의 일환으로 이뤄진 한 연설에서 이러한 담론의 확대 속에 기억의 가치를 새롭게 고려할 필요성을 촉구하며 “유산에는 미적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유산은 그 이상의 많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적지는 본질적으로 진실의 전달자다. 과거와 현재를, 개인과 우리의 보편적 인간성을 이어주며, 때로는 행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한편, 유적지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의 힘을 통해 되살아나지만, 그 이야기가 반드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완벽한 서사구조를 갖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역사적 내러티브가 그렇듯 복잡하거나 이론의 여지 또는 분열적 요소가 있는 서사의 경우 특히 그렇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이야기들은 주로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긴 시간을 거쳐야만 온전히 밝혀진다. 유적지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가 지닌 힘을 인정하고 신중하게 그 힘을 행사할 때 방문객과 지역 공동체가 유적지에 담긴 여러 가지 진실을 자세히 살피고 동시에 과거를 반성하고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러한 고찰은 유적지에 대한 최종 목표가 아니라 시작점으로 보는 것이 이상적이다. 최종 목표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해석의 렌즈를 확대하여 예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포함한 다수의 관점을 끌어안으며 포용성을 보장할 때, 비로소 유적지는 그 유적지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깊이 들여다보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물론, 바르고 공정한 미래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 위해 타인들의 이야기에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으로 탄생할 수 있다.
양심회복을 위한 국제연합(International Coalition of Sites of Conscience)은 인권과 사회정의를 향한 과거의 투쟁과 그 투쟁이 현재에 남긴 유산을 연결해 주는, 역사 유적지와 박물관, 그리고 기억 이니셔티브의 유일한 글로벌 네트워크이다. 나는 이러한 국제연합의 이사로서, 유적지와 박물관이 사회를 기억에서 진실로, 또 정의로 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불러일으키는 영향력을 날마다 목격하고 있다. 20년째 활동을 이어 온 양심회복을 위한 국제연합은 총 70개국의 300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회원들은 대서양을 오가며 이루어진 노예무역과 그로부터 파생된 현대의 인종차별 및 노예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노예의 집(Maison des Esclaves)을 비롯한 서아프리카 유적지부터, 미국의 엘리스섬과 벨기에의 부아 뒤 카지에(Le Bois du Cazier)처럼 과거의 이민과 노동착취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이민자와 난민,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유적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역사를 고찰한다. 그 전후 맥락이 무엇이고 초점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모든 양심의 장소는 역사에는 공유해야 할 교훈이 있으며 과거는 변화를 촉진함으로써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더욱 포용적이고 평화로운 미래 사회를 만들기 위한 행동에 나서게 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결속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특히 고통스럽거나 이론의 여지가 있는 것일수록 역사의 교훈은 쉽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역사의 교훈이 정의 사회 건설이라는 목적에 입각한 공동체의 지지가 없다면 수정주의적 내러티브를 강화하고 언론의 자유와 시민 참여를 억제함으로써 긍정적인 사회 변화나 새로운 관점과 화해, 치유를 위한 힘이 되기는커녕 오랜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중간 항로와 항구 기념 프로젝트(Middle Passage Ceremonies and Port Markers Project)가 주관한 추도식 © The International Coalition of Sites of Conscience

우리는 과거가 분열의 심화가 아닌 변화의 토대로 작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에서, 역사 및 문화 유적지에서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프로그램은 전인적, 다학제적이고 공동체가 주도하며 현대적 관련성이 높은-즉 역사에 뿌리를 두되 현재의 문제를 다루는-프로그램임을 확인했다. 이 같은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유적지의 운영권자와 운영, 공공 프로그램, 전시, 해석 등을 평가한 뒤 여기서 누구의 목소리가 빠져 있는지, 어떤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 질문한다. ‘그 대상은 여성인가? 아니면 원주민 공동체 구성원들인가? 폭력이나 압제 희생자들의 목소리는 어디 있는가? 또 지역사회 구성원들과 노인층, 청년층은?’ 이에 시민사회 참여를 강화하고 유산의 변혁적 기능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답을 찾고 있는 대표적인 양심의 장소(그중 일부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를 소개해 보겠다.
미국에 있는 토머스 제퍼슨의 몬티첼로(Monticello)는 오랫동안 제퍼슨의 이야기를 전해왔지만, 제퍼슨과의 사이에서 여섯 명의 자녀를 출산한 노예 여성 샐리 헤밍스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은 불과 최근의 일이다. 이 유적지는 헤밍스의 후손들은 물론 노예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더 큰 공동체와의 협력하에 노예제도의 끔찍함과 그것이 오늘날 미국사회에 남긴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불평등을 온전히 인정하는 차원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단순히 포함되는 데 그치지 않고 핵심으로 부각될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1944년 이탈리아 볼로냐 인근에서 750명이 넘는 민간인이 나치에게 학살당한 장소에 자리 잡은 몬테 솔레(Monte Sole) 평화 학교 재단은 이곳의 역사와 유적을 활용하여 몬테 솔레와 그 너머의 지역에서 나치즘을 가능케 했던 사회적 배경을 철저히 파헤쳐 보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몬테 솔레는 미술, 대화, 창작 공연, 스토리텔링을 통해 토론을 유도하고, 특히 청소년을 중심으로 한 방문객들 대상으로 희생자/압제자로 나뉘는 이분법 등의 개념과 이러한 탐색 결과를 오늘날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심도 있게 고찰해 보도록 이끈다.
감비아의 국립예술문화센터(NCAC)는 감비아의 예술과 문화의 보존, 진흥, 개발을 책임진 기관이다. 과거 대서양을 오가는 노예무역 장소였고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유적지로 등재된 쿤타킨테섬(구 제임스섬)도 NCAC에서 관리하고 있다. NCAC는 또한 과거 노예무역의 유산과 현재의 경제 불평등 간의 연결고리를 명확히 밝히는 내러티브와 공공 아트 프로그램으로 이 역사 유적지를 활성화하기 위해 이곳에서 각각 관광 가이드와 전통 공예가로 활동할 지역 청소년을 25명씩 훈련시키고 있다. 이 사업은 직업능력 개발과 일자리 창출을 통해 감비아 청년층에 심각하게 나타나는 긴급한 이주 위기 문제를 완화할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쿤타킨테섬에서 공유되는 역사적 이야기와 방문객들의 체험이 현재의 사회 문제와 과거를 연결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감비아의 문화예술을 자랑하는 동시에 지역사회 구성원들에게 경제적 기회까지 제공하는 효과가 있다.

1944년 나치에 의해 800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당한 마르차보토 산에서 열린 몬테 솔레 평화 학교 재단의 교육 프로그램과 청소년 캠프 © The International Coalition of Sites of Conscience

지난 10년 사이 끄데이 카루나(Kdei Karuna)는 크메르루주 정권이 자행한 만행의 역사에 대한 고찰과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캄보디아에서 평화 구축 및 화해에 힘쓰는 선도적인 NGO 중 하나가 되었다. 캄보디아 전역의 유적지에 마련된 참여형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통해 진실을 알리고 과거를 기념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이니셔티브를 시행하며, 그 과정에서 전 크메르루주 고위 간부들과 희생자들, 소수민족 집단, 노인과 청소년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참여시키고 있다. 최근에 양심회복을 위한 국제연합은 크메르루주 집권 기간에 이루어진 강제 결혼과 성폭력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해 끄데이 카루나와 제휴하여 일련의 연극 공연을 개최했다.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청소년들이 그 시기를 겪은 노인들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토대로 작품을 창작해 보는 이벤트도 마련되었다. 참가자들의 창작극은 한때 감금과 처형이 이루어진 장소였고 지금은 기념 지구가 된 프놈 트룽 밧에서 상연되었다. 이 뜻깊은 프로젝트는 유산과 세대 간의 대화, 공연을 활용해 강제 결혼의 여파와 현대 캄보디아 사회의 젠더 규범에 미친 영향을 집중 조명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예는 칠레의 비야 그리말디(Villa Grimaldi)이다. 피노체트 독재 정권 시절 감금, 고문, 학살이 자행되었던 이 장소는 오늘날 비야 그리말디 평화공원으로 바뀌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과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 형무소의 생존자들이나 희생자 유가족들은 이곳에서 공유되는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얻은 교훈을 지역 중등학교와 주민 커뮤니티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지금의 사회문제 해결에 적용 해보는 과정을 통해 위안과 치유, 그리고 변화의 계기를 얻는다.
이러한 양심의 장소들에 반영되고 이곳에서 촉진되는 다양한 관점은 우리의 광범위한 국제 활동을 표상한다. 진실을 말하려는 노력을 거스르는 강력한 반대 세력은 오랫동안 존재해 왔고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전체주의와 박해의 역사를 조작하거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효과적으로 지워 없앰으로써 인권뿐 아니라 기억 자체를 겨냥한다. 이 같은 경향은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훼손하고 소외 집단, 희생자와 생존자, 원주민 공동체, 소수 종교 및 민족 집단의 이야기를 공공 담론에서 배제하는 민족주의적 수사와 극단주의적 정책의 증가 현상과 궤를 같이한다. 양심의 장소들은 역사의 가장 어두운 장이 삭제된다면 힘들게 얻은 교훈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적 내러티브가 투명하고도 대담하게 제시되고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되는 경우에는 개인, 지역사회, 그리고 전 세계적 차원에서 깊은 연결고리를 새로이 늘릴 수 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힘에 관한 논의이다. 다시 말해 누가 어떤 스토리를 전할지 결정하며 스토리를 어떤 방식으로 전하는지에 관한 논의이다. 어떤 장소의 역사에 관해 좀 더 편안히 전달될 수 있는 이야기만 선택하고 이론의 여지가 있는 기억 등을 제외해서 전체 이야기를 반영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더는 우리가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한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애초에 이론의 여지가 있는 기억이 만들어지게 한 불공정한 권력 체계를 영속시키는 꼴이다.
그렇다면 기억과 문화예술의 장소가 지닌 변화의 잠재력이야말로 우리가 공유된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 인간성을 이해하게 해주고 상호 유대감을 키우고 보호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 방법은 세대 간 대화나 예술에 기반한 스토리텔링처럼 은근하고 간접적일 수도 있고, 희생자와 생존자 및 후손 공동체에 대한 피해 보상 촉구처럼 구체적이고 직접적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바로 이런 역할 때문에 유산은 단순히 우리와의 연관성에 그치지 않고 지금, 그리고 먼 미래에까지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이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