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엔 가이욧
CNRS-CREDO(오세아니아 연구 기록센터)
전문적인 타투 세계에서 사모아인들은 타투를 금지하려는 선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관습을 지속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마리아 수도회의 신부들과 런던선교회의 아카이브에 있는 자료의 연구를 통해 사바이이(Savai’i) 서부 도서지방의 일부 지역과 이 지역의 알리이(alii, 고위 추장)들이 19세기 후반 타투 입사의식을 거행함으로써 교회에 저항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러한 저항은 결국에는 마리아수도회 신부들이 사모아의 타투 관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로마 본부에 공식적인 허가를 요청하게 만들었다.
백여 년에 걸친 이 관습에 대한 강한 믿음은 오늘날 사모아인의 이주와 함께 널리 확대되고 있다.(Mallin and Galliot 2019)
‘타타우(Tatau)’라고 하는 것은 ‘투푸가 타 페아(tufuga ta pea, 타투 전문가)’가 행하는 것으로, 그는 사용하는 도구와 잉크제작뿐만 아니라 오스트로네시아어 사용자들 사이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피부에 상처를 내는 데에도 전문가이다.(Robitaille 2007) 타투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타투를 받는 사람들의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그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의식에 따라 행해지고 있다. 가족은 이 의식과 관련된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지원한다.
타투는 연속해서 다섯 번에서 열 번 정도 나누어 행해진다. 남성과 여성의 타투는 표준화된 디자인으로 구성되는데 남성을 위한 디자인은 페아(pea), 여성을 위한 타투는 말루(malu)라고 한다. 타투를 받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복잡한 디자인이 새겨지는 것 같지만 투푸가는 저마다 약간씩 모양에 변화를 줄 수 있다. 타투 의식에서는 타투 전문가와 그의 조수(autufuga) 그리고 응원단(아우타푸아이(autāpuai), 타투를 받는 사람의 가족과 친구) 간에 공식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타투를 하는 동안 침묵과 반복적인 응원 구호는 타투를 하는 사람과 응원단 간에 이루어지는 중요한 상호작용이다.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측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신경 쓰는 것이다. 타투의식의 준수, 적절한 언어적 상호작용 또는 투푸가에 대한 적절한 보상 등이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드물게는 큰 상처를 입히는 결과를 가져오거나 타투를 중단하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타투를 받는 사람의 피부를 다시 시술해야 하는 등 타투 행위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은 타투를 받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반영된다. 이는 타투를 받는 사람이나 그 가족들에게는 정말 불명예스러운 일이 된다.

Back of man’s pe‘a in the making, Vaipu‘a, 2005 © Sébastien Galliot
이러한 의식 행위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모아에서 이는 가옥 건축가들(tufuga fau fale)의 의식 행위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 다른 조상에서 기원하지만 그들은 매우 유사한 지위를 누리며, 서비스를 요청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예방책과 적절한 의식을 통해 그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보장하지 않으면 그 일을 해주지 않는다. 타투가 끝나고 나면 마무리 의식은 두 단계로 행해진다.
먼저 투푸가는 타투를 받는 사람의 머리 위에 달걀을 올려놓아(옛날에는 초록색의 코코넛액을 흩뿌렸다.) 그것를 짓누르는 파아사(faasā, 차단)로부터 그를 해방시킨다. 그리고 사마(sama, 강황과 코코넛오일의 혼합물)로 타투를 받는 사람의 몸을 문지름으로써 피부에 상처를 내고 잉크로 물들이는 비도덕적 행위를 상쇄시킨다.
그 다음 타투를 받는 사람의 가족들은 우무사가(umusaga,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흙으로 만든 신성한 화덕)를 진행한다. 이 특별한 의식은 투푸가의 신분에 맞는 구체적인 칭호를 모두 알고 있는 직함보유자가 진행하는 일련의 공식적인 선물 수여 절차로 구성된다.
기독교 선교사와 식민지 지배자들이 촉발한 정치적, 종교적 변화로 인해 폴리네시아의 타투 의식은 중단되었지만 사모아인들은 오늘날까지 전문적인 타투 기술과 타투 의식에 관한 지식을 전승해왔다. 1980년대 초 태평양 지역에서 문화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서구의 타투 전문가들은 이곳의 타투 유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도구 제작에서 의식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대한 지식의 유일한 보유자였던 사모아인에게 눈을 돌렸다.
술루’ 아페 파울로 2세(Sulu’ ape Paulo Ⅱ)와 그의 사촌 파시나 세포(Pasina Sefo)처럼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던 사람들은 다문화적 배경을 지닌 많은 도제들의 멘토가 되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술루’ 아페 알라이바’아(Sulu’ ape Alaiva’a, 파울로의 형)와 그의 아들들은 폴리네시아인과 사모아인 후손들에게 국경을 넘어 기술을 전승하는 데에 집중했다.
이러한 독특한 배경으로 인해 사모아의 타투 의식은 호주, 뉴질랜드, 미국 그리고 유럽 등지의 사모아인 공동체에 사모아의 타투 의식을 전파하고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동시에 무형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유엔의 정책을 다소 효과 없게 만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유엔이 추진하는 수입 창출을 위한 유산의 보호, 전승 및 진흥 사업은 이미 사모아인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모아인의 방식이란 가족으로서 의무와 가족에 대한 봉사를 중요한 문화적 가치로 여기는 것이다.